응급실 당직 중 발열 환자가 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 중 하나가 CBC(일반혈액검사) 결과지입니다. 모니터 속 솟구친 백혈구(WBC) 수치를 보며 우리는 긴장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백혈구가 높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이 보병인지, 공군인지, 게릴라인지에 따라 아군의 대응 병력이 달라지듯, 우리 몸의 방어군인 백혈구도 어떤 종류가 증가했느냐에 따라 진단은 세균 감염, 바이러스 질환, 혹은 알레르기로 완전히 갈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정교한 방어 시스템의 구성원들을 하나씩 해부해 봅니다.
"백혈구는 단일 세포가 아닙니다. 각각의 고유한 임무와 무기를 가진 5개 특수 부대의 연합군입니다."
1. 과립구(Granulocytes): 최전선의 즉각 대응팀
현미경으로 봤을 때 세포질 내에 알갱이(과립)가 보이는 백혈구들입니다. 골수에서 생성되며, 감염 초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급성기 반응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① 호중구 (Neutrophils) [Image of neutrophil structure]
백혈구 중 가장 많은 비율(약 50~70%)을 차지하는 '최전방 보병'입니다. 주로 세균(Bacteria)과 곰팡이 감염에 대응합니다. 식균 작용(Phagocytosis)이 뛰어나 병원균을 잡아먹고 자폭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사체들이 바로 우리가 보는 '고름(Pus)'입니다. 급성 염증 시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며, 미성숙한 띠 모양의 호중구(Band form)가 증가하면 심각한 감염(Left Shift)을 시사합니다.
② 호산구 (Eosinophils)
전체의 1~3%를 차지하며, 기생충 감염과 알레르기 반응을 담당하는 '특수 저격수'입니다. 기생충의 표면에 달라붙어 독소 과립을 분비해 파괴합니다. 현대에는 기생충보다는 천식, 아토피, 두드러기 등 알레르기 질환이 있을 때 수치가 상승하는 것을 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③ 호염기구 (Basophils)
가장 적은 비율(1% 미만)을 차지하지만, '경보 장치' 역할을 합니다. 히스타민(Histamine)과 헤파린을 함유하고 있어, 알레르기 항원과 만났을 때 혈관을 확장시키고 면역 세포들을 불러모으는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와 같은 급격한 과민 반응에 깊게 관여합니다.
2. 무과립구(Agranulocytes): 정밀 타격과 후방 지원
과립구와 달리 세포질에 과립이 뚜렷하지 않은 세포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특이적 면역(Specific Immunity)이나 장기적인 방어 작용, 그리고 전투 후의 청소 작업을 담당합니다. 바이러스 질환 감별에 있어 핵심적인 지표가 됩니다.
④ 림프구 (Lymphocytes)
백혈구의 20~40%를 차지하는 '지휘부 및 특수 부대'입니다. 주로 바이러스 감염과 암세포를 방어합니다.
- T세포: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암세포를 직접 공격(세포성 면역)하거나 전체 면역 반응을 조절합니다.
- B세포: 항체(Antibody)라는 미사일을 생산하여 병원균을 무력화(체액성 면역)하고, 적의 정보를 기억합니다.
- NK세포 (Natural Killer): 비정상적인 세포(암, 바이러스 감염 세포)를 감지하여 즉각 사살합니다.
⑤ 단핵구 (Monocytes)
혈액 내에 머물다가 조직으로 이동하면 거대한 대식세포(Macrophage)로 변신하는 '중장비 탱크'입니다. 호중구보다 늦게 도착하지만, 더 강력한 식균 작용으로 죽은 세포, 박테리아 잔해 등을 청소합니다. 만성 염증이나 결핵 같은 질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백혈구 종류별 비교 및 임상적 요약
| 종류 (한글/영문) | 정상 비율 (%) | 주요 표적 (Target) | 증가 시 의심 질환 |
|---|---|---|---|
| 호중구 (Neutrophil) | 50 ~ 70% | 세균, 곰팡이 | 세균성 폐렴, 패혈증, 급성 충수돌기염 |
| 림프구 (Lymphocyte) | 20 ~ 40% | 바이러스, 암세포 | 독감, 간염, 결핵, 림프종 |
| 단핵구 (Monocyte) | 2 ~ 8% | 세포 잔해, 만성 감염 | 결핵, 감염성 심내막염, 자가면역질환 |
| 호산구 (Eosinophil) | 1 ~ 4% | 기생충, 알레르기 | 천식, 아토피, 약물 알레르기 |
| 호염기구 (Basophil) | 0.5 ~ 1% | 알레르기 항원 | 만성 골수성 백혈병, 심한 알레르기 |
4. 임상적 팁과 Q&A
진료실에서 환자분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백혈구 수치가 높으면 무조건 항생제를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림프구가 증가한 바이러스성 감기에는 항생제가 효과가 없습니다. 따라서 총 백혈구 수치(Total WBC count)뿐만 아니라, 백혈구 감별 계산(WBC Differential Count)을 통해 어떤 세포가 증가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진단의 핵심입니다.
Take Home Message
- 호중구(Neutrophil): 세균과 싸우는 주력 보병으로, 급성 염증과 고름 형성의 주체입니다.
- 림프구(Lymphocyte): 바이러스와 암세포를 공격하는 특수 부대로, T세포와 B세포가 있습니다.
- 감별의 중요성: 총 백혈구 수치보다, 어떤 종류의 백혈구가 증가했는지가 정확한 원인 파악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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